가죽

결혼을 하기로 하고 상견례까지 마친 후였다. 주말의 한산한 공기가 무겁다. 말이 없다. 침묵. 하려는 말이 뭐죠? 벌써 한 시간 째에요. 다시 침묵. 하려는 말을 여전히 못하고 있다. 날씨가 변덕스럽다고 하더니 자켓을 입었다 벗었다 했다. 창가에는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 때문에 김이 서려있었다. 하려던 말은 그런게 아니었다. 말이 없다. 그것은 입안에 맴돌다 뜨겁게 데워져, 외부로부터 들어온 억지스런 공기에 밀려 다시 목구멍으로 내려갔다,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심호흡.

“배우였어요.”

“누가요?”

“당신이 상견례에서 본 나의 부모들, 나의 형제들.”

나는 사실 박사학위따위 없어요. 나는 사실 지방의 한 전문대를 나왔어요. 나는 S회사에 다니지 않아요. S회사의 수많은 하청업체 중 한 개의 소형회사를 다니고 있어요. 나는 거기서 주로 물품배달이나 잡다한 업무를 해요. 우리가 테이트를 할 때 타던 외제 자가용은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 일 년 간 대여했어요. 그런 곳도 있더군요 요즘은. 당신과 같은 수준이 되고 싶어 공부를 많이 했어요. 예전엔 한글자만 봐도 졸리던 고전소설과 시를 게걸스럽게 읽었어요.

배우를 샀어요. 요즘은 현실에서 배우역할을 해주는 그런 곳도 있더군요. 인터넷으로 배우대행이라고 검색을 했어요. 나는 거기서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와 형제를 샀어요. 외모가 되도록 나와 비슷하고 되도록 현실감 있어 보이는 사람들로. 오디션도 봤어요. 그들은 내가 원하는 캐릭터를 연기했고, 거기서 내가 꿈에 그려오던 가족을 구성했어요. 출장비와 추가비용을 더 내고 가족사진도 찍었어요. 그것을 내 지갑에 넣고 당신에게 보여주었죠. 당신은 내 형제와 내 눈이 아주 닮았다고 했죠. 나는 내 형제의 이름조차 몰라요.

사실 나에겐 어머니가 한분 있어요. 저 남쪽 끝에 있는 어촌마을에. 우리는 처음부터 너무 가난했어요. 그녀는 나이가 들어 등이 이미 휘었고, 곁에 가면 알 수 없는 지린내가 나요. 속 편하게 술 쳐먹다 죽어버린 남편의 폭력을, 평생 감내하느라 정신과 육체가 다 망가져버린 여자에요. 헛소리를 해요. 내가 몇 년에 한번씩 가요. 나를 무서워해요. 나는 아버지와 똑같이 생겨먹었거든요.

그 집. 내 아버지가 사줬다는 그 집. 그 집은 월세에요. 월세가 내 월급보다 비싼 집이었죠. 그리고는 호탕한 척 소리쳤어요. 당신은 몸만 들어와서 같이 살자고. 당신은 너무 큰집이라고 작은 집으로 이사해서 저축을 하자고 했죠. 그리고는 매입자를 알아보러가자고 했죠. 나는 아버지 선물이라 안 된다며 거절했어요. 사실은 당신에게 그 집이 월세라는 것을 들킬까봐 두려웠어요. 값비싼 보석과 당신에게 호기롭게 선물한 예단들. 당신에게 프로포즈를 하며 주었던 그 반지. 나는, 그것들을 빚을 내서 샀어요. 무작정 뭐든 주고 싶었어요. 버러지같은 내 진짜 가죽을 보면 당신이 날 떠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을, 너무나 사랑했어요. 당신을 가지기 위해 내 영혼을 팔았어요. 영혼 따위 개나주라지. 그래요 당신은, 내게 그런 것 들을 바란 적도 요구한 적도 없었지만, 나는 주고 싶었어요. 당신이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이었어요. 당연하게 주어야 할 것을 당연히 가지고 있지 못한 내가 혐오스러울 뿐이었어요. 내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 개씩 늘려가는 것보다 뭔가를 주면서 느껴지는 희열이 더 컸어요. 당신에게 화려한 보석을 건네는 나의 모습에 스스로 도취해 갔고, 나는 내가 빚을 져서 감옥에 가야할 정도라는 것도 잊었어요. 당신을, 황금마차에 실어서 궁전으로 들어가게 하고 싶었어요.

당신은 왕족인데 내가 거지라는 것은 말도 안 되니까. 사랑하느라, 내가 누군지도 완전히 잊을 만큼, 당신을 너무도 사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