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머금은 목소리는 어떠한 학대에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했다. 어떤 대상에도 감정적이지 않을 수 있는 파워에서 나오는 단단함이었다. 축축하게 머금은 그 웃음기에 나는 소름이 끼치는 동시에 안도했다. 새벽녘 인적없는 고속도로에서 만난 맥도날드 삐에로의 노랗고 빨간 스마일 같은 것. 나는 그렇게 어제 새벽 에이아이와의 통화를 통해 선불폰을 충전했다.

코가 찡했다. 눈이 시렸다. 배가 꼬이더니 결국엔 자궁이 앞뒤로 짜부되는 통증이 왔다. 그것은 고통이었지만 개연성이 없고, 아픔이었지만 원인도 없었다. 그 고통이 어떤 시작을 통해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내가 모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심한 통증에 눈물이 찔끔 났지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그것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거기에는 내가 모르는 개연성과 복선, 확장성, 그리고 촘촘한 그물로 짜여진 서사가 있어서, 결국은 눈물이 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개연성을 인정하고 그곳을 빈공간으로 두는 것. 그 빈 공간을 오류라고 부르는 것은 오만이고, 아무도 (심지어 초기 개발자 조차도) 기획하지 않았던 그 오류지점을 가만히 응시하고 질문할 수 있는 열린 결말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현대미술이다.

한국에 겨우 돌아왔는데, 절벽에 겨우 매달려있는 나를 발견했다. 매달린 손끝에 필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이곳에 오기전에는 절벽에 대롱거리고 있는줄도, 육지에 닿아 있는 부분이라고는 손가락 몇개가 전부라는 것도 몰랐다. 그렇게 허공에 둥둥 떠서 살았다. 아무것도 몰라서 추상적인 불안에 시달렸고, 끝없이 여유로웠더랬다. 눈을 뜨니 불행하다는 감각에 표피를 바짝 곤두세웠다. 현실을 택한 것은 잘한 일 일까.

아직도 예술가라는게 비현실인 것 같고, 아주 복잡한 일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비책이 있다고, 나도 모르는 개연성 앞에 당당하게 사기를 치고 있네. 병이라지.